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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년 04월 02일 zmanz 0098 보이체크/레옹스와 레나 Woyzeck / Leonce und Lena
게오르크 뷔히너 Georg Büchner(독일, 1813~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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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천재작가 뷔히너, 그가 남긴 작품은 드라마 3편(≪당통의 죽음≫, ≪레옹스와 레나≫, ≪보이체크≫)과 소설 1편(≪렌츠≫)에 불과하다. 그는 이렇듯 총 4편밖에 안 되는 작품을 남겼지만, 훗날 이 4편의 작품이 일으킨 파문은 해일이 되어 독일문단을 뒤덮는다. 그의 작품은 카프카의 저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였다. 그는 “이상적인 인물들만을 원하고”정선되고 다듬어진 문어(文語)만이 공용어로 통용되던 당시의 독일 문단에 결함을 지닌 인간들, 예컨대 당통과 같은 쾌락주의자와 렌츠와 같은 광인을, 보이체크와 같은 제4계급, 즉 기층민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들로 하여금 외설을 입에 담고, 토막언어를 사용하게 했던, 이른바 당대 문단의 이단아였다.

독일문학에 대한 뷔히너의 반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렇듯 작품의 등장인물을 영웅이 아닌 ‘반(反)영웅’으로 설정하고, 이들로 하여금 다듬어진 문어(文語)가 아닌 일상어로 말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외적 언어가 주류를 이루던 당시에 ‘의식의 흐름’ 기법의 모태가 되는 내면의 언어, 즉 ‘경험언어’를 그의 소설 ≪렌츠≫에 도입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완결된 문체와 더불어 완결된 구성, 즉 폐쇄형식만이 문학의 예술성을 담보해주던 독일 문단에서 과감하게 미완의 형식, 즉 개방형식을 들고 나왔다.

이러한 이단아가 당대의 문단에서 환영을 받을 리 만무했다. 뷔히너의 작품 중 그의 생전에 출판된 것은 ≪당통의 죽음≫ 단 한 편뿐이었다. 더욱이 이 작품은 독창성이 부족하고, 등장인물들의 언어가 비속하며, 작품의 구성이 엉성하다는 혹평을 면치 못했다. 그의 작품 전집이 출간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도 40여 년이 지난 1879년이었다. 독일문학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클라이스트, 횔덜린, 카프카 등이 그랬던 것처럼 뷔히너도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뷔히너의 ≪보이체크≫이 독일의 시적 리얼리즘 문학을 대표하는 켈러에 의해 “에밀 졸라의 ≪나나≫보다 사실성이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은 이래로 뷔히너는 더 이상 독일문학의 이단아가 아닌 혁명아, 총아로 부활하게 된다. 독일 자연주의 문학을 창도한 하우프트만은 1887년에 베를린의 어느 문학협회가 개최한 강연회에서 뷔히너의 “힘 있는 언어”와 “생생한 묘사” 그리고 “자연주의적 인물 서술”을 극찬했는가 하면, 그의 작품 ≪사도(使徒)≫와 ≪선로지기 틸≫은 뷔히너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작품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이렇게 뒤늦게 천재성과 현대성을 인정받았지만 그때부터 뷔히너의 문학은 그 영향권을 급속도로 넓혀 나간다. 그는 베데킨트, 트라클 등과 같은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극작가 및 시인을 비롯해서 브레히트, 첼란, 막스 프리슈 , 페터 바이스 등 수많은 독일 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 밖에도 12음계를 창안한 작곡가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보첵(Wozzeck)> 또한 뷔히너의 ≪보이체크≫을 소재로 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날 독일 문단에서 뷔히너가 차지하는 자리, 즉 그의 의미는 더없이 크다. 이는 우선 뷔히너의 이름으로 수여되는 문학상이 오늘날 독일 문단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자리매김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그런가 하면 하인리히 뵐, 엘리아스 카네티, 귄터 그라스 등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은 뷔히너 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모두가 한결같이 자신이 뷔히너 문학의 영향권에 있음을 자랑스럽게 고백한다.

대체로 천재는 개인적 성향이 강한 데 반해 뷔히너는 참다운 삶의 의미를 자신의 삶 안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밖에서, 즉 더불어 사는 삶에서 찾았다. 그는 유복한 시민계급, 즉 유산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교육을 받고 미래가 보장된 신분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독재정권 타도를 위해 반체제운동에 가담했는가 하면, 굶주리는 농민을 위해 투쟁에 앞장섰다. 그는 자신이 다니던 대학도시 기센에서 <인권협회>를 조직하기도 하고, 농민의 혁명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헤센 급전≫이라는 정치적 전단(傳單)을 작성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뷔히너의 문학은 이토록 치열한 삶을 산 사람의 ‘심정 고백’이다. 그의 작품이 경향성을 띠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그의 작품에서는 경향성이 작품의 문학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경향성이 문학적 완성도를 높여준다. 이를테면 그의 경향성은 벤야민이 말하는 바로 그 경향성이다(벤야민에 의하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경향은 문학적 경향 또한 내포하고 있다. 함축적이든 명시적이든 올바른 정치적 경향 속에 깃들어 있는 이러한 문학적 경향이 바로 작품의 질을 결정하게 된다”).

뷔히너의 천재성은 문학 창작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학문세계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독서량은 범인(凡人)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는 그토록 짧은 기간에 문학과 철학, 종교를 비롯한 고대의 정신문화에 관한 서적을 폭넓게 읽었는가 하면, 현대 문학과 철학, 역사를 포함한 인문학 서적을 탐독했으며, 성서를 정독했다. 뷔히너의 한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는 “특히 셰익스피어, 호머, 괴테, 각종 민요, 아이스킬로스 그리고 소포클레스를 좋아했으며”, “장 파울과 주요 낭만주의 작가들”을 읽었다. 뷔히너는 이렇듯 읽기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읽은 것을 옮기고 그것에 대한 평론을 쓰기도 했다. 그가 남긴 <데카르트론>이라든가 <스피노자론> 등에는 합리주의 내지 관념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있다.

이렇듯 인문학 분야에 넓고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뷔히너가 막상 대학에서 전공한 학문은 의학, 즉 자연과학이었다. 의사인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택할 수밖에 없었던 전공이지만 그는 공부를 시작한 지 약 5년 되던 해인 1836년 9월에 <물고기 신경조직에 관하여>라는 논문으로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취리히 대학으로부터 초빙을 받아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는 불과 23세에 대학교수가 된 것이다.

하지만 뷔히너의 삶은 안타깝게도 여기서 마감한다. 그는 취리히 대학에서 <시험 강의>를 한 지 채 3개월이 지나지 않은 1837년 1월 말 발병하여 다음달 2일부터 병석에 눕는다. 그 후 불과 일주일 만에 혼수상태에 빠져들고, 끝내 같은 달 19일에 세상을 떠난다. 뷔히너의 임종을 지켜본 약혼녀 빌헬미네 얘글레는 그의 마지막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이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저는 그이의 두 눈을 입맞춤으로 감겨드렸어요.”스물네 살의 한창 나이에, 이제 막 정신세계가 영글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울 나이에 질풍처럼 노도처럼 살아온 뷔히너, ‘질풍노도’의 사나이 뷔히너는 열병 장티푸스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홀연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가 취리히의 크라우트가르텐 공동묘지에 묻히던 날, 장례식에는 지역 유지들과 대학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율리우스 바브라는 작가는 요절한 뷔히너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폭풍과 더불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가 폭풍 속으로 사라진 게오르크 뷔히너−우리는 일찍이 이런 작가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의 운필(運筆)은 현존재의 총체적 기능으로부터 형성되는 숨결이다.

뷔히너는 정녕 천재요,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다. 1972년에 최초로 체계적인 뷔히너 평전(≪뷔히너와 그의 시대≫)을 쓴 뷔히너 전문가 한스 마이어는 뷔히너의 미학을 “젊은 천재적 인간의 정치적, 사회적 기본구상”이라고 극찬한다. 그런가 하면 뒤렌마트와 더불어 스위스의 현대 (희곡)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막스 프리슈는 뷔히너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우리는 결코 그의 천재성을 따라가지 못 한다”고 말한다.



해설                

뷔히너의 마지막 작품 ≪보이체크≫(1836∼?)는 오늘날 뷔히너의 작품 중에서 가장 무대에 많이 오르는 작품이다. 12음계를 창안한 작곡가 알반 베르크에 의해 1921년에 ≪보체크(Wozzeck)≫라는 이름으로 오페라로 만들어진 이래로 이 작품은 음악 애호가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에서도 ≪보이체크≫는 브레히트의 작품들과 더불어 독일 희곡작품 중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품이다.

≪당통의 죽음≫ 및 소설 ≪렌츠≫와 마찬가지로 뷔히너는 ≪보이체크≫도 역사기록에서 그 소재를 취했다. 그는 의사인 부친이 구독하던 의학 잡지에서 자기 애인을 칼로 살해한 한 이발병에 관한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이 글은 살인범의 정신감정을 의뢰받았던 의사 클라루스 박사가 이 잡지에 여러 차례에 걸쳐 기고한 것으로, 살인할 당시 살인범의 정신상태가 정상이었는지 아니면 정신이상이었는지를 감정한 감정서였다. 이 감정서의 최종 감정결과에 의하면, 범인 보이체크는 간혹 정신이상증세를 보이기도 했지만 여자를 살해할 당시에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살인범은 범행을 저지른 지 약 3년 만에 공개 처형되었는데, 이 사건은 당시 일반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였을 뿐 아니라 학계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뷔히너는 이 감정서를 소재로 하여 ≪보이체크≫를 집필하였지만, 클라루스 박사와는 달리 보이체크의 정신 상태 그 자체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그를 정신이상자로 만들고 살인자로 만든 사회에 보다 큰 관심을 두었다.

뷔히너는 ≪보이체크≫를 통해 현대 (희곡)문학의 내용과 형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선 내용면에서 살펴보면 이 작품은 독일문학사에서 ‘추(醜)의 미학’의 효시를 이루는 작품이다. 독일문학사상 최초로 제4계급, 즉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뷔히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 어떤 존재이든 간에거기에 생명, 즉 현존재의 가능성이 부여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그것으로 족하다. 우리는 그것이 아름다운가 추한가에 관해서는 묻지 말아야 한다. 창조된 모든 것은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신념은 미와 추를 초월한다. 이 신념이야말로 예술의 유일한 판단기준이다.

뷔히너는 여기서 “현존재의 가능성”, 즉 인간의 삶 그 자체를 강조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생명의 존엄성 앞에서 미와 추의 개념은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작가가 삶의 힘을 강조하는 한편, 예술의 최고 규정이 아름다움이라는 이상주의 문학의 제1원리를 부정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그의 관심의 초점은 현자 나탄이나 파우스트, 또는 돈 카를로스와 같이 완전성을 추구하는 세계 구원자, 즉 아름다운 인간이 아니라 콰지모도나 보이체크, 등과 같이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결함을 지닌 주변인, 즉 ‘추한’ 인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뷔히너의 문학이 추의 미학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고 뷔히너의 문학이 추의 세계를 칭송하거나 미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뷔히너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곳도 아름다운 세계다. 다만 그는 미와 추의 개념을 종래와는 달리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그는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보다는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이러한 아름다움을 발굴해 내기 위해 외형적으로 보잘것없는, 단순한 존재, 즉 한 사회에서 가장 변두리로 밀려난 말단 인생을 묘사 대상으로 선정한다. 뷔히너는 작품 ≪렌츠≫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의 삶 속으로 침잠해 보라. 그리고 그 삶을 떨림과 암시와 아주 섬세하고 거의 눈치 챌 수 없는 표정연기로 재현해 보라.

여기서 “보잘것없는 존재의 삶”은 다름 아닌 렌츠의 삶이요, 나아가서는 보이체크의 삶이다. 이러한 삶 속에는 아름다운 영혼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이 내면은 화려한 외관밖에 보지 못하는 ‘근시안’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사물을 꿰뚫어보는 눈, 즉 “고유한 본질 속으로 파고들어 갈 수 있는” 눈과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의 삶 속으로 침잠할 수 있는” 눈에게만 보인다. 그러면 이러한 눈은 어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눈을 가진 사람은 “어리석음을 자기의 외부에서만 찾는” “소위 우스꽝스러운 외관”이나 “보잘것없는 잡동사니”를 자랑하는 교양인과 지식인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할 줄 알고, “고통 받고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 즉 인간애를 지닌 사람들이다. 여기서 뷔히너 미학의 사회성 내지 정치성이 드러난다. 그뿐 아니라 여기서 우리는 뷔히너 문학에 담긴 독특한 리얼리즘을 만나게 된다.

뷔히너의 이러한 변화된 시각은 작품의 내용에서 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보이체크≫에서 기존 단일사회를 조명할 수 있는 개방형식을 도입한다. 전통극은 인과법칙 및 기승전결의 원리를 이상적으로 구현시킬 수 있는 ‘5막 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반해, ≪보이체크≫는 이러한 막 대신 수 없이 많은 짤막한 장(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장들은 각기 나름대로 독립성을 지니고 있어, 전후 연관관계를 느슨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이 극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강조한 “삼일치의 법칙”, 즉 시간과 장소와 줄거리의 통일이 깡그리 무너진다. 심지어 어떤 장면들은 그 순서를 뒤바꾸어 놓아도 극의 진행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이러한 개방형식의 도입을 통해 뷔히너는 브레히트에 앞서 일찍이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와 객석간의 거리를 확보해 줌으로써−브레히트의 표현을 빌리면 “제4의 벽”을 침으로써−무대 위의 사건을 비판적으로 관찰하게 만든다.

뷔히너는 몽타주기법으로 구성된 여러 개의 짤막한 장면들을 통해 보이체크가 몸담은 사회가 어떤 모순을 안고 있으며, 그가 어떻게 무너져가는지, 그리고 그가 왜 사랑하는 여자 마리를 살해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배운 것과 가진 것은 없지만 보이체크는 “열린 면도칼”처럼 예리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한 보이체크를 오로지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경멸하고, 정신이상자로 몰아가는 사회, 자신의 몸을 열 개로 쪼개고, 심심지어 의학실험도구로 내 맡겨도 처자식 하나 제대로 부양할 수 없는 사회, 자신의 유일한 삶의 의미였던 “하나밖에 없는” 여자를 빼앗아 간 사회에서 한 인간이 광인이 되고 살인자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중대장이 마리의 간통을 고자질하는 장면에서 쫓기는 자, 벼랑 끝에 선 보이체크가 하늘을 향해 내뱉는 절규가 비수처럼 우리의 가슴을 찌른다.

[…] 충분히 그럴 수 있죠. 더러운 년! 충분히 가능한 얘기죠. 오늘은 날씨가 꽤나 아름답군요, 중대장님. 보십시오, 하늘이 저렇게 아름답고 우람하게 펼쳐져 있지 않습니까! 쇠갈퀴를 저 하늘에다 던져서 꽂아놓고 목이라도 매달고 싶은 심정입니다.

보이체크의 비극은 그 혼자만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대표한 제4계급의 비극이다. 아니 그의 비극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비극이기도 하다. 환생한 중대장과 의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 않은가. 21세기의 제복과 가운으로 갈아입은 이들은 절대진리로 자신을 무장한 채 끊임없이 흑백논리를 재생산해 내고 속죄양을 만들어내면서 이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 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거센 돌풍은 오늘도 보이체크를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 뷔히너의 보이체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보이체크도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카프카의 저 여곡마사처럼 쫓기고 또 쫓긴다. 어쩌면 우리의 보이체크는 뷔히너의 보이체크보다 더 비극적일는지도 모른다. 후자는 비록 자신이 쫓기는 이유는 모르고 있었지만 자신이 쫓기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보이체크는 자신이 쫓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광고라는 지배 이데올로기, 언론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 또는 사이버세계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세뇌된 우리의 보이체크는 이들 지배 이데올로기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면서도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자신의 삶이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뷔히너의 보이체크는 불가사의한 세상의 이치를 규명해 보려고 생각을 하고, 불행한 이웃을 보고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만 우리의 보이체크에게는 이러한 이성과 감성이 메말라 있다.−보이체크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레옹스와 레나≫(1836년 초여름∼?)는 뷔히너의 작품 중 그 소재를 역사에서 취하지 않은 유일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뷔히너가 독일의 한 유수 출판사가 주관하는 현상모집에 응모할 생각으로 집필했지만 송고(送稿)가 기일 내에 이루어지지 못해 미 개봉된 채 반송된 작품이다. ≪보이체크≫와 ≪당통의 죽음≫이 비극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희극작품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정의 하자면 이 작품은 대부분의 현대 희극이 그러하듯이 희비극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 텍스트의 ‘기표’는 희극적이지만 ‘기의’는 비극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언어와 행동은 희극적이지만, 이들 언어와 행동 뒤에 감추어진 여백, 즉 행간에서는 비극적인 상황이 읽혀진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이들 언어와 행동이 희극적이면 희극적일수록 행간의 이야기는 그만큼 더 비극성을 띤다.

예컨대 궁정의 시종 두 명이 레옹스의 부친 페터에게 옷을 입혀주는 장면은 이 작품의 장면들 중에서 가장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인데, 여기서 독자(관객)는 왕의 우스꽝스러운 자태와−이 장면에서 왕은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등장한다−언행에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게 된다. 이 장면에서 페터는 “사람은 생각을 해야 돼"라는 말로 입을 뗀다. 이어서 그는 ”난 내 신하들을 대신해서 생각을 해야 한단 말이야. 그자들은 생각할 줄 모르거든. 생각할 줄 몰라”라고 말한다. 그러한 그가 주체철학의 저 거창한 개념들, 예컨대 “실체”, “물자체”, “속성”, “카테고리”, “체계” 등과 같은 개념들을 자신 내지 자신의 옷가지를 비롯한 부속물들과 등치시키는 코미디를 벌이다가 갑자기 “내가 뭘 생각하려고 했었지?”하고 시종들에게 묻는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것을 시종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속으로) 생각한 것을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이를 타인에게 묻고 있는 페터를 보노라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 웃음은 그가 마침내 “짐의 백성들을 생각하려고 했었지!”라고 말하는 순간 그 절정에 달한다. 신하들이 생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대신 생각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의 생각의 대상이 무슨 심오한 사상 내지 철학적 과제라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그가 애써 기억해낸 생각이라는 것이 “백성”이라는 지극히 간단한 단어 하나라는 사실을 간파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웃음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웃음은 곧 유쾌한 웃음이 아니라 허탈한 웃음으로 전도된다. 왕은 백성 그 자체를 위해서 백성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 레옹스의 결혼식에 들러리를 세우기 위해 백성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저 행간의 비극성이 우리의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한 나라의 백성이 이토록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전제군주에 의해 통치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의 웃음은 얼어붙기 때문이다.

≪레옹스와 레나≫는 외형상으로는 낭만주의 작품처럼 보인다. 주인공 레옹세가 동경하는 세계는 상상과 꿈, 그리고 죽음의 세계이다. 현실을 외면하고 이상세계를 지향하는 그는 자신의 시종 발레리오와 함께 꿈에 그리던 이탈리아를 향해 여행을 떠난다. 그는 목적지에서 이상적인 여인 레나를 만난다. 이 여인과 함께 고국에 돌아온 레옹스, 그녀와 결혼을 하고 아버지로부터 왕권도 물려받는다. 군주가 된 레옹스는 낭만주의자(이상주의자)답게 신부 레나에게 이 나라를 이상향, 즉 겨울이 없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말한다. −이런 장면만 보면 이 작품은 틀림없이 낭만주의 작품이다. 그러나 여기서 작품의 행간은 우리에게 주인공 레옹스가 펼치는 낭만주의 세계가 아니라 “고기 굽는 냄새”조차 제대로 맡아보지 못한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현실세계를 더 생생하게 각인시켜준다. 발레리오는 레옹스가 구상하는 겨울이 없는 나라가 건설되려면 어떤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는지를 그 특유의 재치와 아이러니컬한 언어로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그러면 소인은 국무대신이 되어 법령을 반포하죠. 손에 못이 박인 자는 금치산자로 규정하고, 몸에 병이 들도록 일한 자는 범죄자로 처벌받게 하고, 땀 흘린 얼굴로 빵 먹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는 누구나 정신이상자로, 인간사회에 위협적인 존재로 규정하게 될 것이옵니다.

레옹스의 천국은 “손에 못이 박이고, 병이 들도록 일하고, 땀을 흘린” 백성들의 희생 위에서만 건설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레리오는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레옹스가 여기서 꿈꾸는 유토피아, 겨울이 없는 나라는 하이네가 저 ≪겨울동화≫에서 풍자한 “독일”, 즉 ‘겨울 공화국’의 다른 이름이다. 레옹스의 유토피아는 그들만의 천국일 뿐 백성에게는 지옥이다. “칼리굴라와 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냉혈한(冷血漢)이기에, 백성을 노리개로 생각하는 독재군주이기에 레옹스는 겨울이 없는 나라, 상하(常夏)의 나라를 꿈이 아닌 현실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따뜻한 ‘여름’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동원된 백성은 얼마나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하겠는가. 레옹스의 여름은 하이네의 저 ≪겨울동화≫의 슬픈 메타포다.

때문에 우리는 저 ≪당통의 죽음≫의 주인공 당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레옹스의 권태 역시 세계고(世界苦), 즉 우주의 보편적 현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들의 권태는 특권계급 또는 기생인간들의 전유물로 발레리오와 로제타 또는 보이체크, 마리 등과 같이 기아에 허덕이는 하층민에게는 가진 자들, 유한족(有閑族)들의 즐거운 비명이요, 배부른 자들의 한가한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 한마디로 ≪레옹스와 레나≫는 낭만주의 작품이 아니라 낭만주의에 대한 패러디, 즉 낭만주의를 비판한 작품이다.



역자 소개         

임호일은 고려대학교 독문학과에서 학사,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독일 뮌헨과 마인츠 대학에서 수학, 오스트리아 그라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독어독문학회 부회장, 한국 뷔히너학회 회장, 동국대학교 도서관장 및 문과대학장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번역은 원전에 대한 도전이다?”, “추의 미학의 관점에서 본 뷔히너의 리얼리즘”, “가다머의 예술론”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변증법적 문예학≫(플로리안 파센 저), ≪진리와 방법≫(한스-게오르크 가다머 저, 공역), ≪한스-게오르크 가다머≫(카이 하머마이스터 저)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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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4월 02일 19시 34분 2008년 04월 02일 19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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